Tea기록.

Tea기록. 테일러 오브 헤로게이트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티를 마시게 됐다.

리야기 2024. 11. 15. 18:41

매일 마시던 요크셔 레드 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잘못된 결심으로 배송받고 계속 쌓아두기만 했던 홍차를 열었다. 처음 마시는 차 맛을 기억하기 위해서 비스킷도 준비하고 새로산 찻잔도 꺼냈다. 과연 맛이 어떨지 살짝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한모금 들이켰다.
 

처음 먹어본 '테일러 오브 헤로게이트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티'의 맛은 이렇다.
스트레이트로 먹었을 때 느껴진건 '싱거움'이였다. 차가 우려질때부터 향이 약했는데 맛도 약하다. 싱거움에 당황함을 느끼고 한번 더 마셔봤는데 원래 먹던 요크셔 레드 티에 수돗물을 희석한 듯한 옅은 쇠맛이 느껴졌다. 홍차보다는 물대신 마시는 보리차같은 밋밋한 맛이다. 그래서 바로 우유를 넣어 먹어봤는데 우유맛이 그대로 올라온다. 안그래도 라라비타 멸균우유의 비릿한 맛이 싫은데 홍차가 그걸 완화시켜주지 못하니 먹기 싫어졌다. 
 

그런데 나는 이 홍차를 다 마셨다. 게다가 한 잔 더 마실까 하는 아쉬움까지 가지면서 마지막 남은 한방울까지 남김없이 마셨다. 한잔을 끝까지 다 마시고 나니 영국사람들이 왜 차를 시도때도 없이 먹는지 알게됐다. 싱겁고 약하고 옅은 슴슴한 맛이라 입에서 부담이 없고 같이 먹는 음식의 맛을 해치지 않는다. 마치 평양냉면같은 슴슴한 중독성이 있다. 이 차는 아침에 일어나 잠을 깨우며 마시기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튀지 않는 향이 비몽사몽한 정신을 천천히 느근하게 달래주고 뜨거운 차 한모금이 넘어가면서 온 몸의 장기를 한번씩 어루만져줄 것 같다.
 

먹기 싫었던 차가 또 마시고 싶을 만큼 만족스러운 경험이 신기하다. 오랜시간이 걸린 것도 아니고 여러번 먹은 것도 아니고 딱 한 잔으로 일어난 변화다. 이 변화의 원인이 궁금했다. 차는 아무것도 안하고 내 혀와 코가 달라진건지 아님 차가 우린 뒤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는 건지.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 같은 차를 한번 더 마셨다. 아까와 같은 물양에 우린 시간도 우유양도 똑같이 했다. 다시 마신 차는 만족스러웠다. 스트레이트로 마셨을때 슴슴한 옅은 수돗물 맛이 여전했고 우유의 비릿한 맛이 그대로 올라왔지만 꿀떡꿀떡 넘어갔다. 이 차의 끝맛은 깔끔하다는 결론을 알고있으니 계속 마시게 된다. 간식 페어링 없이 오직 차 맛에 집중하면서 먹었는데 특별할것없는 맛이다. 열심히 음미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져서 쉽게 마신 것 같기도 하다.
 
내 인생에서 좋았던게 싫어지는 경우는 흔해도 싫었던게 좋아진 경험은 별로 없다. 처음 느껴지는 감정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건 나의 오래된 버릇이다. 이 버릇때문에 사소한 오해를 만들기도 하고 추후에 후회한적도 있다. 그럼에도 뭔가 나의 삶의 경력에서 첫 느낌으로 판단했던 대부분이 맞은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이 버릇을 쉽게 고칠 수 없었다. 하지만 홍차마저 첫 맛과 끝맛이 다른데 그 외 많은 것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홍차 한 잔으로 나의 오래된 버릇을 조금씩 고쳐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