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그림이 있는 유리컵을 샀다.
가지고 있는 접시와 세트 같았다. 빨간 체리열매와 초록색 가지가 그려진 컵이라 하얀 우유에 녹차가 한 층으로 꾸며진 그린티라떼를 담고 싶었다. 그리고 접시에는 초코 디저트에 하얀 생크림을 추가해 체리를 포인트로 올려서 완벽한 티타임을 그려봤다. 철저하게 계획하지 않고 대략 이미지만 떠올린 티타임 계획은 실패했다.
우선 가지고 있는 접시에 그림이 컵과 같은 체리가 아니라 튤립이다. 색만 비슷하고 전혀 다른 그림이다. 그리고 초코 디저트는 찾지 못했다. 슈퍼에서 파는 브라우니는 올리기 싫고 그렇다고 애매한 빵집에서 맛이 어떨지 모르는 디저트를 도전은 더더욱 싫었다. 차선으로 스콘을 사자하고 들린 빵집에 하필이면 스콘만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마지막 남은 빨간 라즈베리 케이크를 올렸다. 그리고 그린티 라떼는 컵에 녹차와 우유를 반대로 담아 내가 원하는 녹차가 한 층으로 시작해 하얀 우유에 서서히 녹아드는 그림은 나오지 않고 우유가 컵에 담기자마자 연둣빛으로 섞였다.
안 그래도 아침부터 영화를 볼 계획으로 부지런히 외출준비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식사를 포장할 식당까지 결정했는데 보려고 했던 시간대가 IMAX 뿐이라 내가 가진 영화 예매권을 사용할 수 없었다. 보려면 쌩돈을 내야 해서 고민하다가 마음을 접고 다시 침대에 누워 우울했다.
물론 돈을 내면 계획대로 움직일 수 있지만 돈을 낸다는 것부터 이미 내 계획은 어그러졌다.
처음부터 꼬이기 시작해 우울해진 기분을 만회하려 차린 티타임은 더더욱 꼬였다. 내 마음에 썩 들지 않는다. 뭔가 나사 3개 정도 빼먹고 조립한 이케아 쇼파같다. 겉보기엔 괜찮고 하자는 주인만 아는 불량품.
그래도 어찌어찌 차린 티테이블 사진을 찍으니 하루를 기록했다는 뿌듯함에 기분이 조금 풀렸다. 달달한 그린티 라떼를 마시니 접시에 튤립그림을 한치의 의심도 없이 체리로 착각했던 게 웃겼다. 웃음이 나오니 어차피 이 티타임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될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았다. 딱 정해진 초코 디저트가 없었고 체리는 동네 슈퍼에서 팔지 않는다. 스프레이 휘핑크림도, 이런 뜬구름 같은 계획이니 실패하는 게 당연하다.
이렇게 인정하고 나니 홀가분해졌다. 어찌어찌 차린 티테이블이 꽤나 근사해 보였다. 물론 그린티라테는 반대로 다시 도전할 예정이다.
망가지고 실패한 결과로 우울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복기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발견할 수도 있고 실패했어도 만족스러울 수 있다. 실패의 원인은 나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다.
이렇게 티타임을 가지며 나는 실패에 아주 살짝 너그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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