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묘해서 알록달록한 그림을 그렸다.
반해버린 작품이 있는데 돈이 아깝기도 하고 우리집에 와도 잘해줄 자신이 없어 마음을 접었다. 그 작품을 대리만족할 수 있게 초반 색감을 따라했다. 기술과 미감이 없는 나는 결국 그 작품과 전혀 다른 느낌이 나왔지만 다양한 색으로 범벅된 그림이 마음에 든다.
테일러 오브 헤로게이트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티가 아무래도 싱거운 느낌이라 알록달록한 그림을 그리며 마시면 차를 마셨다는걸 잊을 것 같아서 다시 요크셔 레드 티로 마셨다. 조금 더 향이 짙은 게 내 취향이다. 요크셔 레드 티는 우유를 넣으면 약간 녹진해지는게 훨씬 맛이 좋다. 알록달록한 그림도 녹진해진 레드 티를 이기진 못했다.
차를 마시며 그림을 그리니 아니 그림을 그리며 차를 마시니 세상에서 제일 근심걱정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 평일 낮 시간에 이런 여유는 호사에 가깝다. 영원히 지속될 호사는 아니지만 이 경험은 좋은 기억이 될 것이다. 이 기억으로 어떤 돌파구를 마련한 느낌이다. 아마 손이 떨리고 감정조절이 안될 정도로 화가 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힘든 날, 아무 이유없이 축축 쳐지고 풀이 죽은 날, 근심걱정으로 집중이 안 되는 날 그 부정적인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물감을 꺼내고 물을 끓이며 내 감정이 절반은 정리가 됐을거고 붓에 물감을 묻히고 티백이 우려지면서 그 감정이 과연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가 복기하고 그림을 완성하며 우유 넣은 홍차를 마실 때 부정적인 감정은 사라지거나 다른 감정으로 바뀔 것이다.
스트레스를 그대로 받는데 푸는 방법은 당최 몰랐다. 스트레스 해소가 일평생 고민이자 숙제였다. 스트레스로 미칠 것 같을 땐 대부분 술을 마시거나 폭식을 하거나 영화를 봤다. 하지만 그냥 스트레스받은 상태로 술을 먹고 폭식을 하고 영화를 본거지 해소되지 않았다. 나는 휘발되는 활동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걸 알게됐다. 나는 기록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홍차 한 잔을 마실 때 예쁘게 셋팅하고 그걸 사진과 동영상으로 남기고 또 그때 느낀 기분과 감정을 이렇게 적어낼 때 기분과 감정이 정리된다. 그러고나면 나에겐 스트레스가 아니라 내가 기록한 내가 정리한 나에게 도움되는 것만 남는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림 자체가 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차 한잔을 마시며 내 일평생 숙제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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